피아노 음반을 아무렇게나 눌렀을 때 나는 소리를 음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.
거기엔 소리가 있을 뿐이다.
높낮이와 리듬이 다른 소리를 골라내고 균형을 맞춰 정리했을 때
비소로 음악이 된다. 정원 철학자인 Charls Moore는 정원을 똑같이 비유했다.
"자연의 대지는 아직 정원이 아니다.
인간에 의해 선택되고 다시 구성되었을 때 정원은 비로소 탄생한다."
바람이 포플러 나무를 통과하는 소리에도 음의 높낮이와 화음이 있다.
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바나나 나뭇잎에 떨어질 때도 리듬과 박자가 다르다.
자연 속엔 임간이 만들어낸 콘체르토나 소나타보다 더 아름다운 음의 균형과 조화가 있다.
하지만 그래도 우린 이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음악이라 말하진 않는다
음악은 자연의 음을 빌려와 인간의 음으로 다시 탄생시킨 창조물이다.
정원의 돌은 스스로 굴러와 자리잡지 못한다.
가을마다 붉은 오디를 만들어내는 뽕나무도 '저절로'가 아니라
정원사가 자로 잰 그 자리에만 선다.
서쪽 노을빛에 드리워진 그림자도
풍광을 만드는 귀재인 정원사의 각도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.
Moore의 말처럼 정원은 인간이 창조한 또 하나의 음악일 뿐이다.
그래서 우리가 정원 속에서 자연자체를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
우리가 정원 속에서 듣고, 들이마시고, 음미해야하는 주체가
결국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걸 알아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.
음악과 같은 정원,
가든디자이너 오경아의 <영국 정원 산책>


